분데스리가와 한국축구의 차범근 감독
한국 축구에서 해외 무대를 처음으로 제대로 개척한 사람은 누구일까. 지금처럼 손흥민이나 이재성 같은 선수들이 독일에서 뛰는 시대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홀로 도전을 선택한 선수가 있었다. 바로 차범근이다.
1970년대 후반 아무도 시도하지 않던 유럽 무대에 발을 내디뎠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독일로 간다는 것 자체가 모험이었고 성공할 거라고 확신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차범근은 끝내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냈고 지금은 한국 축구의 상징적인 이름으로 기억된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한국축구의 전설 차범근 감독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다.
1. 독일 무대
1978년, 차범근은 독일 분데스리가의 다름슈타트 98에서 유럽 생활을 시작했다. 사실 이때는 잠시 머무는 정도였고, 많은 출전 기회를 잡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이 시간이 의미 없었던 건 아니다.
독일의 빠른 경기 템포와 거친 몸싸움, 새로운 전술을 경험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진 시작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프랑크푸르트라는 더 큰 무대가 그를 불러들였다.
이적이 확정되던 순간 차범근은 이제 진짜 승부다라는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낯선 땅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했으니 긴장감은 엄청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2. 아시아의 폭격기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범근의 진짜 실력이 폭발했다. 강력한 중거리 슛, 빠른 스피드, 그리고 파워 넘치는 돌파가 독일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1979-80 시즌 UEFA컵은 그의 커리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순간이다. 이 대회에서 차범근은 5골을 터뜨리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시아 선수로서 유럽 대항전에서 주역이 된다는 건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때 붙은 별명이 바로 아시아의 폭격기였다. 프랑크푸르트 팬들은 물론 독일 언론도 그를 주목했고 차범근은 단숨에 세계적인 공격수 반열에 올랐다.
3. 레버쿠젠
1983년 차범근은 레버쿠젠으로 이적했다. 새로운 팀에서의 도전은 늘 부담스럽지만 그는 오히려 더 큰 성과를 만들었다. 1987-88 시즌 UEFA컵에서 레버쿠젠은 결승까지 올라갔고 차범근은 핵심 공격수로 활약했다.
결국 레버쿠젠은 결승전에서 에스파뇰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고 이로써 차범근은 UEFA컵을 두 번이나 들어 올린 최초의 아시아 선수가 되었다.
레버쿠젠 역사에서 이 시기는 지금도 특별하게 기억된다.
구단을 유럽 무대 정상에 세운 주역 중 하나가 바로 한국인 선수였다는 사실은, 당시 독일 팬들에게도 상당한 충격이었다.
4. 한국축구와 차범근 감독
차범근의 도전은 단순히 개인 커리어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국 축구 전체에 큰 울림을 남겼다. 무엇보다 아시아 선수도 유럽에서 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게 가장 크다. 그 전까지만 해도 아시아 선수는 체력적으로 부족하다는 편견이 있었지만 차범근은 그걸 실력으로 깨버렸다.
국가대표팀에서도 그의 경험은 큰 힘이 됐다.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주장을 맡아 한국 축구가 세계 무대에서 버틸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비록 성적은 아쉬웠지만, 차범근이 대표팀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은퇴 이후에는 지도자와 해설자로 활동하며 후배 선수들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지금도 한국 축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이름이 바로 차범근이다.
차범근은 한국 축구 역사에서 단순한 스타 선수가 아니라 길을 열어준 개척자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가지 않던 길을 먼저 걸었고 결국 독일 분데스리가와 유럽 대항전 무대에서 아시아 최초의 성과를 만들어냈다.
지금 고등학교에서 땀 흘리며 훈련하는 선수라면 언젠가 해외 무대를 꿈꾸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때 차범근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좋겠다. 도전은 항상 어렵지만 끝내 해내면 역사가 된다. 그는 바로 그 사실을 몸으로 증명한 선수였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한국축구의 전설 차범근 감독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해 보았다. 앞으로도 한국축구 선수가 해외축구리그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하나씩 확인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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